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정치사/중기/발칸 반도와 에게해 일대 (문단 편집) ==== 몽골의 침략과 쇠퇴기 ==== 1241년 5월 또는 6월 부친이 사망한 뒤 7살의 나이로 차르에 올랐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1237년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국가 중대사를 대신 맡았다. 그러나 1242년 [[바투 칸]]의 몽골군 별동대가 불가리아 북부 일대를 유린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타르노보, 프레슬라프, 이사체아 등 적어도 12개의 불가리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십자군 창설을 촉구했다. 교황은 칼리만에서 서신을 보내 불가리아 정교회를 교황청에 합류시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측은 이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았고, 십자군 창설 역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 바투 칸과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원정군은 불가리아에 이어 폴란드, 헝가리를 파괴하고 독일로 진격했으나,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몽골로 귀환했다. 1246년 8월 또는 9월, 12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티스에 따르면, 그의 사망에 대해 질병으로 죽었다는 소문과 신하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동시에 나돌았다고 한다. 사후 이복동생인 [[미하일 아센 1세]]가 8살의 나이로 차르가 되었다. 어머니 이리니와 불가리아 총대주교 페터르가 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지만, 나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는 이때를 틈타 불가리아를 전격 침공하여 벨버즈드, 멜니크, 스코페, 세레스, 필리레프, 테살피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여기에 헝가리도 베오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공략하였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도 마케도니아 서부를 공략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1247년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상대할 때 군사 지원을 해줘야 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1254년 11월 3일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자, 불가리아는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개시해 스타니마카, 페루시티사, 크리힘, 체피나 페르페레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가 주력군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파견하여 불가리아군을 물리치고 로도프 산맥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했다. 미하일 아센 1세는 1255년 말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손녀 안나 아르파드와 헝가리의 봉신인 로슽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와 결혼하였고, 이를 토대로 헝가리의 군사 지원을 받아냈다. 1256년 봄 헝가리와 연합하여 니케아 제국을 공격해 트라키아를 약탈했으나, 곧 테오도로스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불가리아는 1256년 6월 차르의 장인인 로스티슬라프를 니케아로 파견해 평화 협약을 논의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이 불가리아가 일전에 잃었던 영토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때에야 평화 협약에 서명하겠다고 하였다. 로스티슬라프는 이에 동의하였고, 양국은 마리차 강의 상류를 국경으로 정했다. 귀족들은 이 결정에 격노하였고, [[칼리만 아센 2세]]는 터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미하일 아센 1세를 습격해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과 [[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에 불복하여 각자의 지배지에서 차르를 칭하면서, 불가리아는 세 차르간의 내전 시대를 맞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